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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B 필모그라피]01. 목격자의밤-유지훈
나비효과
목격자의 밤 - 유 지훈
벌 한마리가 날아 들어왔다. 무채색의 차가운 벽에 보란 듯이 들이박은 벌은 제 앞에 펼쳐진 것들이 지금껏 귀로 눈으로 냄새로 듣고 보고 맡아온 익숙한 풍경이 아니라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란 몸짓이다. 벌은 위잉 소리를 내며 형광등 불빛 속으로 사라졌다가 이내 날개 짓을 아래로 접어 낮잠을 자고 있던 체육의 뒷목을 훑었고 다시 창유리에 달라붙어 출구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벌의 움직임을 무심코 지켜보고 있던 지훈은 주임선생의 기척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뒷짐을 지고 들어온 주임 선생은 가볍게 지훈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호흡을 깊게 내셨다. 학생주임은 나이, 쉰 가까이 먹은 남자로 자신의 말이 곧 신념이고 법인 선생이었다. 그는 지훈을 보자 곧 바로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빨리 끝내자구나."
벌은 창문을 바짝 달라붙어 정수리를 쳐 박았다. 잠시 윙윙 소리가 멎었다. 지훈은 침을 삼켰다. 끈적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지훈은 시선을 떨구었다. 혹여나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지훈의 입은 보란 듯이 주임이 제 앞에 다리를 꼬고 앉은 것과 동시에 비틀어졌다. 주임은 검정 하드커버로 된 책장을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지훈이 너는 성적도 우수하고, 출결도 깨끗하고……"
한장 한장 넘기더니 다시 앞으로 돌아와 한 문장을 손가락을 가져다 짚는다. 안경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면서 지훈을 바
라보았다. 기다랗고 촘촘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훈아, 내가 너 사정 잘 아는 거 알지?"
벌은 다시 위잉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교무실 안은 벌의 날갯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좀처럼 제 업무만 하던 사람들도 모두 한 마리의 작은 벌레에게로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할머니 생각 해야지 공부도 잘하는 놈이, 할머니는 너만 보고 사시는 분이시잖니."
내말 무슨 말인지 알지. 주임의 입 꼬리가 위를 향해 꺾인다. 그는 제 앞에 앉은 불쌍한 소년으로 부터 자신의 가르침이 증명되었다는 순간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야간 자율 시간에 학급 친구와 뒹굴었단 사실에 조롱하는 눈을 하면서 입은 자비를 배 풀고 있음을 말하며 제 흥에 겨워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주임은 손에 깍지를 쥐고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날 야간자율 끝나고, 어디로 갔다고?"
"…곧장 집으로 갔어요."
"그래, 종하와는 무슨 사이 라고?"
지훈은 숨을 크게 들이 키고 비져 나오는 숨을 꽉 다문 입술로 막았다. 구역질이 났다, 눈을 패일 듯 비벼댔다. 목구멍은 타들어갈듯이 쓰라렸고 눈은 울음을 참느라 핏줄이 팽팽해져 눈가가 시렸다.
"그냥 학급 친구입니다."
"한 번 더 물으마."
그는 꼰 다리를 풀며 말했다.
"남자가 좋으니?"
"아니요."
"그럼."
"여자가 좋습니다."
그리고 주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목에 찬 시계바늘을 보며 웃옷을 여미고 교무실을 나섰다. 맞은편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체육이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그는 책상 밑에 아무렇게나 벗어둔 슬리퍼를 들고 교무실 중앙을 원을 그리며 도는 벌을 반쯤 잠긴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친 벌은 가느다란 앞다리로 천장에 붙어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은 체육은 까치발로 다가가 그대로 슬리퍼로 벌의 날갯죽지를 내리쳤다. 벌은 무채색의 차가운 천장에서 날개가 꺾인 채 떨어졌다. 지훈은 수업을 알리는 종이 치고 다시 끝을 알리는 종이 칠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
"지훈씨는 성격이 내성적이신가 봐요?"
지훈은 또 끄덕였다. 새로 일하게 된 매장에서 처음 만난 지훈의 또래 여자는 말이 많았다. 아니, 웃음이 많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려나. 늦가을의 바람이 불면서 그녀 어깨에 살짝 닿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아까부터 그녀는 조근 조근 웃으면서 지훈 에게 질문을 하면 지훈은 대답했다. 일방적으로 그녀는 묻고 자신은 대답하는. 이 대화가 지루하지는 않는지 지훈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아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예상이 맞으면 맞는대로 흥미로워했고 또 빗나가도 빗나가는 대로 흥미로워했다. 그녀는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웃을, 그런 여자였다.
"저도 그래요. 밖에서 놀고 있으면 집에 가서 빨리 쉬고 싶다 생각해요. 지훈씨, 혹시 동생 있죠?"
"네."
"여동생?"
"아니 남동생이요."
"아, 부모님이 힘드셨겠다."
지훈은 대답 않고 앞을 보았다. 그녀는 대답 없는 지훈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남자 둘 있는 집은 보통 힘들어 하시더라 구요. 그렇지 않아요? 라고 물었다. 지훈은 마지못해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자취해요? 아니면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요?"
'"자취요."
지훈은 그녀의 질문을 신경 쓰며 듣고 대답 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지훈의 마지막 대답에 여자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끊기자 곧 둘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침묵이 이어졌고 머쓱해진 여자는 오늘 날씨 끝내주네요 했다. 지훈은 다른 이들처럼 만남을 즐기지 못했다. 처음 만난 상황에서 이례적으로 주고받는 대화를 몇 번 겪었더니 자신이 남들 보다 설명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 과정이 여간 귀찮은 것 아니라는 걸 스물 한 살의 지훈은 알고 있었다. 지훈은 코를 훌쩍이고 머리를 긁적이며 여자를 향해 말했다.
"저, 매장에 핸드폰을 놓고 와서 그런데, 먼저 식사하러 가실래요?"
여자는 알겠다며 이따 보자고 했다. 곧 바로 뒤돌아 담배를 꺼내 문 지훈이 그제야 아까까지 보지 못한 은행나무들이 양쪽에 나란히 즐비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붉고 환하게 산등성을 빼곡하게 수놓았던 낙엽들도 때가 되면 지고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것을 생각하며 지훈을 오던 길을 혼자 되돌아갔다.
***
-다음 역은 미아, 미아역 입니다. 내리실 문은…
매번 인산인해를 이루는 4호선, 그 속에 지훈은 운 좋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 곧 몇 시간 뒤면 치러질 시험을 위해 책을 보고 있던 지훈은 핸드폰 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 번 더 검토 할 수 있는 시간을 세어보며 책장을 넘겼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이윽고 찬바람이 지훈의 무릎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훈은 이내 어딘가 시큼하고 쾌쾌한 냄새에 고개를 들었고 제 앞에 선 여자의 행색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는 때가 묻고 얼룩진 재킷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산발로, 머리카락 에는 이물질이 잔뜩 끼어 지저분했다. 한 마디로 거지꼴 이였다. 여자의 주위에는 자신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속에서 울컥 화가 났다. 계속 책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여자가 자신 앞에 섰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지훈은 자리를 옮길까 하다가 이내 말았다. 그저 시선을 거두고 책에 코를 박을 만큼 가까이 숙였다. 여자는 지훈을 빼꼼 내려 보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학생, 뭐봐?"
"예?"
혹여나 여자가 말을 걸지 않을까 하는 머릿속 상황이 이내 현실로 나타나자 지훈은 탄식했다. 그냥 자리를 옮겼어야 했는데 하고 끊임없이 후회하기 시작한 지훈의 심정을 알기는 하는 건지, 여자는 이번에 허리를 살짝 굽히며 지훈의 손에 들려져있는 책을 골똘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몸을 기울수록 화-악, 피부로 까지 전달되는 그녀의 악취에 지훈은 절로 눈썹이 구겨졌다.
"나는 이런 거 하나도 모르겠어."
"예."
지훈은 가방을 앞으로 당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이상 풍겨오는 악취를 참지 못해 자리를 옮길 곳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역시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고 각자 핸드폰을 만지며, 또는 신문을 보는 사람들의 무심함만이 전철 안에 가득했다. 여자는 여전히 무표정에 초점도 없는 눈으로 지훈을 보았다. 입을 열때 마다 보이는 누런 이빨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 정도로 끔찍했다.
"학생, 나 배고파."
어린애 같은 목소리로 여자는 배고파 배고파. 칭얼대었다. 지훈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에 어지러움을 느끼고 남은 정거수를 세어보았다. 족히 서너 정거장이 남아있었고, 중간에 그냥 내려서 다른 차를 탈까 라는 생각이 스치자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손짓으로 앉으세요, 하였다. 손에 든 가방을 둘러업을 찰나, 여자는 빠르게 지훈의 가방끈을 잡았다. 그러고는 주머니를 뒤져서, 무언가를 꺼냈다. 꼭 그러쥔 손을 지훈에게 내밀며 살며시 폈다. 풍선껌 이였다. 가져가, 학생. 지훈은 조금 고민하다가 그것을 말없이 받고 내리면서 눈에 보이는 휴지통에 획 하고 던질까 하다, 이내 그러질 못하고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
시계 바늘은 새벽 3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지훈은 졸린 눈을 비집으며 크게 하품했다. 앞서 회식 후 거하게 취한 회사원들이 한바탕 난장판을 치르고 간 직후라 지칠 대로 지친 지훈은 카운터에 힘없이 앉아 두 눈을 비볐다. 지훈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본교 등록금 납부에 관한 안내였다. 지훈은 크게 한숨 셨다. 점장은 지훈이 하도 가불해달라고 보채서 이제 지훈이 가불의 '가' 자만 꺼내도 으르렁 거렸다. 휴학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지훈 이였다. 졸업은 할 수 있을까. 그러자 담배생각이 물씬 났다. 지훈은 밖으로 나갔다. 새벽 세시가 넘는 시간이여도 도로에는 여전히 차들이 다녔다. 차들은 한적한 도로를 자유롭게 만끽하려는듯, 하나같이 속도를 높여 쌩쌩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담배에 불을 붙여서 입에 물었다. 매캐한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지훈은 생각에 잠겼다. 한 학기를 쉬려던 게 어느덧 일 년이 되었다. 무엇보다 등록금 마련이 가장 지훈을 힘들게 했다. 또 학교에 잘 가지 않는 석훈과 갈수록 몸이 나빠지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막막했다. 모두 제 맘대로 되지 않았다. 지훈은 담배연기를 한 움큼 머금고 새벽공기에 힘없이 뱉었다. 담배 연기가 걷혀지자 흐릿하게 건너편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사람이 형체가 보였다. 얼굴의 3분의 1을 머플러로 가린 여자는 안장걸음으로 지훈 쪽으로 오고 있었다. 담배마저 피우고 싶을 때 못 피는 억울한 마음을 누르며 지훈은 급하게 담배 불을 비벼 껐다. 퀭한 눈과 지저분한 얼굴, 골골대는 소리와 위태로워 보이는 걸음걸이는 지친 지훈의 몸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쏟아지는 토사물과 진동하는 악취를 막기 위해 지훈은 습관처럼 쓰레기통을 들고 그녀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런데 여자는 지훈이 건네준 쓰레기통에 얼굴을 묻고 구토가 아닌 가래를 길게 뱉고는 샌드위치와 소주 한병을 들고 카운터로 갔다. 머쓱해 하던 지훈도 따라 카운터 앞에 섰다. 그녀는 지훈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 갈라지고 형편없는 목소리였다.
"토하는 사람이 많은 가 봐요."
여자는 내심 지훈이 대답 해주길 바랬다. 큰 길 건너편 두 블록을 지나 골목 모퉁이를 돌아가다 보면 대문이 기울어진 집 하나가 나온다. 그 집 반 지하에서 24시간 내내 적적하고 어두운 방안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여자는 허기 진 배를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구겨놓은 비상금 몇 천원과 얼마 없는 옷들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몽땅 뒤져가며 발견한 동전 몇 개를 챙겨들고 큰 길 건너 지훈이 뜬 눈으로 지새우는 편의점을 찾았다. 여자는 이 새벽, 단지 사람이 그리웠다. 하지만 뻔히 알고 있다는 사람들의 태도에 하나하나 응수 하는 것에 질려버린 지훈 이였다. 이미 겉모습이 지저분한 사람과 다소 불쾌했던 경험을 겪은 지훈 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편의를 위해 죄책감 없이 대답해온 지훈 이였다. 그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손님 이전에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시켰다. 그는 미소를 띠며 나지막이 대답한다.
"아니요, 삼천 팔백원 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묵살된 느낌이 이미 익숙한 여자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지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꼬깃꼬깃 하게 구겨진 천 원짜리 세장과 동전을 내려놓고 문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고 풍경소리가 멎을 때 쯤 이였다. 요란한 크락션과 동시에 아스팔트를 깎는 타이어의 마찰음이 귀청을 때렸다. 그저 손님에 불과했고 그저 점원에 불과했던 둘의 관계는 순식간에 피해자와 목격자로 바뀌었고 그것이 평생 자신을 괴롭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지훈은 끝내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