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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31 [석율주승] 이씨와 청년

[석율주승] 이씨와 청년



 20국이후 연락이 두절된 성대리를 찾아 헤매는 한석율이 성대리와 닮은 이주승과 만난다면.. 




[식샤를합시다2] 이주승 X [미생] 한석율.


    





        이씨는 패악질을 일삼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달려들어 구걸을 하고, 힘이 약한 여자를 상대로 힘자랑을 했다. 같이 지내는 노숙자 동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씨는 자신이 먼저 누운 자리를 빼앗겼다며 초록 천막 뒤집어쓴 사내 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키고 있는 순경의 조치로 이씨는 무리들로부터 격리되어, 서울역을 나서야 했다. 이씨는 혼자서 저물어가는 서울 시내의 하늘을 보며 정처 없이 걸었다. 이씨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이름도, 사는 곳도 기억 나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팔짱끼며 걸어가는 또래의 사람들과, 가게에서 정다운 얼굴로 나오는 사람들과 자신은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이씨는 주린 배를 잡고 터덜터덜 네모난 길을 따라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깜박이며 켜졌다. 이씨는 가로등 불 밝힐 때를 좋아했다. 항상 같은 시간에 켜지는 불빛은 덩그라니 홀로 남겨진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기다려주는 기분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역 노숙자 쉼터에서 나온 뒤 세 시간동안 정처 없이 걸어 다닌 이씨는 피곤함에 눈 꺼플이 무거웠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한발 한발 힘겹게 내딛었을 때다. 불쑥, 엷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눈앞에 찰랑였다. 불그스름한 두 뺨, 생기 있는 이마와 풍성한 눈썹, 또렷한 콧대와 이세상것이 아닐 만큼 투명한 눈동자, 선홍빛 입술, 여인의 춤사위같이 야릇하게 뻗은 입 꼬리. 티 없이 맑은 청년의 얼굴에 자신의 가난이, 자신의 얼룩이 한 꺼 번에 차올랐다. 눈을 마주 할 수 없었다. 단정한 카라 깃 사이로 시원하게 뻗은 넥타이, 곱게 구겨진 옷 주름과, 곤 청색의 눈부신 자켓은 먼지 한 톨도 내려앉을 수 없을 만큼 고귀했다. 이씨는 눈을 끔벅이고 급하게 돌아서 걸어갔다.


'재수 없는 새끼, 눈앞에서 나를 골똘히 쳐다 볼 건 또 뭐람…'


이씨는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청년의 투명한 눈동자에서 투영된 자신의 모습이 잊혀 지지가 않아서였다. 고개를 돌린 곳에 우두커니 대형 쇼윈도가 설치되어있었다. 건조한 사물에 비쳐본 이씨의 모습은 예상대로 처참했다. 피딱지가 눌러 붙은 얼굴과 엉킨 머리카락,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 음 푹 들어간 볼, 무엇보다 이 두 눈, 초점 없이 세상을 떠도는 이 두 눈, 없다. 청년의 눈동자에 서려있던, 청년의 빰따구에 맺혀있던 생기가 이씨의 눈에는 없다. 썩은 가죽만이 끔찍하게 달라붙어 죽지 못해 숨을 쉬고 있었다. 울부짖으려 소리쳐 봐도 입술 가죽이 말라비틀어져 벌려지지가 않았다. 간신히 울음을 토했는데 쉰 목소리로 산 사람 흉내를 낼 뿐이었다. 바스락, 버려진 비닐 봉지에 올라 선채 전과 달리 짐짓 심각한 표정의 아까 그 청년이 나타났다. 손에는 손수건을 들고 있었다. 이씨가 토악질을 하고 있는 줄 알았나보다. 청년은 겁도 없이 이씨의 곁에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이씨는 있는 힘을 다해 청년을 쏘아보았다. 청년이 보는 앞에 굵은 가래침을 뱉었다. 제 앞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였다.


'기분 나쁜 새끼, 멀리 사라져버려, 가버리라고.'


이씨는 어둠을 쫓아 걸었다. 몇 시간 전 떠오른 달빛이 여전히 구름에 가려있어 다행이다. 이씨는 아직 더 걸을 수 있었다.

 이씨는 아득히 멀어지는 도시의 길목에서 주저앉았다. 피로가 눈 꺼플에 매달려 잠을 재촉했다. 달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이씨의 목구멍에 거듭거듭 들어찼다. 이씨는 숨이 막혔다. 솜털이 촘촘히 나있던 아이의 옆얼굴, 가녀린 몸 짓만큼이나 얇았던 아이의 머리카락 , 가는 눈꼬리가 위태롭게 움직였던 아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였다. 이씨가 이따금 밤마다 꾸는 꿈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은 지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선술집에서 말린 장어의 냄새가 세어 나왔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씨는 내달렸다. 멀리, 저 멀리 수평선 끝에 도저히 제 모습을 기억하지 않을 그 곳을 향해 내달렸다. 골이 흔들렸고 다리는 뼈 가죽 밖에 남지 않아 몸을 지탱할 힘이 없었지만 이씨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이미 주저앉아버린 몸뚱이를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한 채 이씨는 달리고 있던것이다. 흐릿한 형체가 이씨의 눈에 차올랐다. 또 다시 청년이었다. 청년은 이씨의 손을 잡고 살며시 들어올렸다. 가방에서 물을 꺼내 이씨의 입안으로 넣었고. 가만히 이씨가 물을 넘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신이 든 이씨는 청년의 접촉에 크게 거부반응을 일으켰고 걷지도 못하는 다리로 달아나려고 몸부림 쳤다. 그런 이씨의 절박함을 청년 또한 당해내지 못했다. 이씨는 청년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차고 일어섰다. 청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해 허공에 대고 허우적, 활개 치는 팔이 순간, 굳어졌다. 


"제발"


낮고 절실한 목소리였다. 이씨는 뒤 돌아봤다.


"제발 도망가지 마요."


청년은 지친듯 비틀거렸다. 이씨보다 건강한 다리를 두었으면서 땅을 지탱하고자 할 의지조차 바닥나보였다. 맑

고 순수한 얼굴에, 달빛 보다 새하얀 얼굴에 이슬 같은 눈물이 툭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이씨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청년의 눈동자에 아득히 펼쳐진 수평선 끝에서 제 발에 밟혀 입술이 터지고 부어오른 가엾은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얼마나 찾고있는데…아저씨만은 도망가지 마요."


'내게 왜 그랬어요' 아이의 원망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씨는 주저앉았다. 잘못했다며 빌어대었다 개처럼, 불행한 짐승처럼, 빌어댔다. 시멘트 바닥에 무릎이 다 갈리는 것도 잊은 채 이씨는 청년을 향해, 정확히는 청년에 눈동자에 비친 아이를 향해 빌어대었다. 청년은 제 앞에 빌어대는 이씨를 힘껏 껴안으며 떠나간 그 사람을 생각했다. 언젠가 만나면 꼭 전해주고 싶었던 말을 뱉으면서.


"괜찮아요, 다 괜찮으니까 내 곁에 있어줘요."

 

 달이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허름한 도시 길목은 가로등 불빛만이 위태롭게 껌벅일 뿐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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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눈치채셨겠지만 ㅅㄱㅅ 작가의 "J 이야기"에 수록된 '시인과 거지' 라는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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